칼럼
송재용 교수님의 칼럼 및 기사
송재용 교수님의 칼럼 및 기사
Date2024-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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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5/14/2010051401698.html
조금 더 지원하면 성공한다는 자기최면에 걸리면 위기 초래
이명박 대통령은 최근 "글로벌 경제위기로 인해 소홀했던 기업 구조조정의 고삐를 죌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면서 은행이 기업 구조조정에 보다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채권단에서는 글로벌 경제위기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일부 대기업집단을 대상으로 추가적 재무구조 개선 약정을 체결해 계열사나 보유 자산 매각을 통해 반강제적 기업 구조조정에 나서기로 했다. 이러한 정부와 채권단의 긴박한 움직임을 보면서 필자는 한국 기업의 전략에 있어서 가장 취약한 점 중의 하나가 자발적이고 선제적인 사업 포트폴리오의 조정임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됐다.
재작년 GE의 제프리 이멜트(Jeffrey Immelt) 회장이 내한했을 때 필자는 그에게 GE그룹의 회장으로서 가장 중요한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했다. 그는 "GE의 사업 포트폴리오를 수시로 재점검해 강화할 사업, 새로 들어갈 사업 그리고 정리하거나 축소해야 할 사업을 골라내는 것"이라고 답했다. 실제로 GE는 이멜트 회장 취임 후 플라스틱사업을 사우디아라비아의 사빅(Sabic)에 매각하는 대신 에너지·환경·수(水) 처리사업을 신성장 동력으로 집중 육성했다. 이멜트 회장은 과거 주력 사업 중 하나였던 가전사업 매각 의사를 공개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GE가 오랜 기간 세계 최고 기업의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자발적으로 사업 포트폴리오를 조정하면서 비주력·비핵심·적자 사업을 정리해 확보한 현금으로 주력 사업과 신사업에 투자를 집중했기 때문이다.
반면 한국 기업들은 어떠한가? 한국 기업들은 빚을 내서라도 사업 영역을 확장하는 데 적극적이었지만, 실패한 사업이나 비주력·비핵심 사업을 구조조정하는 데는 소극적인 경우가 다반사였다. 심지어 소유 경영자가 직접 시작한 사업의 경우에는 실패하더라도 이를 정리하자는 이야기를 꺼내는 것 자체가 불경죄 내지 금기인 경우가 많았다. 오히려 실패한 만성 적자 사업을 유지하기 위해 주력 사업에서 돈을 빼서 무한정 지원하다가 동반 부실화로 이어져서 그룹 전체가 무너진 사례도 많았다.
진로그룹이 대표적 사례이다. 주력 사업인 소주사업은 매우 안정적이고 돈을 잘 벌었지만, 실패한 신사업들을 무한 지원하다 무너졌다. 해태, 삼미, 기아 등 1990년대에 무너진 대부분의 기업그룹이 이러한 범주에 해당했다. 대우그룹의 경우에도 외환위기라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제대로 된 사업 구조조정을 하지 않고, 오히려 '세계 경영'의 기치하에 확장 위주의 전략을 고수하다가 무너졌다고 할 수 있다. 만일 대우그룹이 삼성이나 두산, 한화그룹처럼 외환위기 이후 과감한 사업 구조조정을 자발적이고 선제적으로 단행했다면 그룹을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세계 최대 기업이라 하더라도 기업이 가지고 있는 재무적·인적·기술적 자원은 매우 제한돼 있는 반면, 세상에 할 수 있는 사업은 무궁무진하다. 따라서 기업은 '선택과 집중'의 원칙하에 주력 사업과 신사업을 선정해 투자를 집중하는 한편으로, 한계사업이나 적자사업을 매각 등의 형태로 정리하는 방향으로 사업 포트폴리오를 조정해 가야 한다.
신사업은 높은 성장성과 수익성을 겸비한 매력적인 산업에 속해 있으면서도 기존 사업과 핵심 성공요소 내지 업(業)의 본질이 유사해 기존 사업에서 축적한 역량, 경영 시스템, 조직문화가 이전될 수 있고, 기존 사업과 시너지가 높은 사업을 잘 선별해야 한다.
특히 신사업은 성공할 확률보다 실패할 확률이 훨씬 높기에 신사업에 진입할 때는 내부적으로 지원 기준과 동시에 퇴출 기준(exit rule)도 사전에 명시해야 한다. 그래야 실패한 신사업을 계속 지원하다 동반 부실화되는 우(愚)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다. 기업인도 인간이기에 많은 시간과 비용을 투입하면서 심혈을 기울인 신사업이 실패하게 되면 실패를 쉽게 인정하고 이를 정리하기보다는 '조금만 더 지원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식으로 자기 최면을 걸면서 무한 지원을 하기 쉽다. 따라서 신사업에 진출할 때는 일정 기한 내에 생존을 위해 사전에 정한 최소한의 조건도 달성하지 못한다면 정리한다는 원칙을 명확히 해야 할 것이다.
물론 노동시장의 경직성이 높았고, 기업 인수·합병시장이 활성화되어 있지 않았으며, 임직원들의 충성도를 중시했던 한국 기업이기에 기업이나 사업을 사고파는 대상으로 생각하는 서구 기업에 비해 사업 구조조정이 원천적으로 어려웠던 현실은 이해한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사업 포트폴리오를 대대적으로 변화시킨 두산그룹의 사례를 보면 한국에서도 사업 포트폴리오의 조정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고 선택의 문제임을 알 수 있다.
물론 평상시에 사업 포트폴리오를 조정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그러나 사업 구조조정에는 고통이 수반되고 공감대 형성이 중요하므로 외환위기 직후에 그러했듯이 한국적 상황에선 경제 위기 상황이 오히려 사업 구조조정의 적기일 수 있다. 이러한 경제위기 국면에서 기업에 부실화의 징후가 감지된다면 정부나 채권단이 강제적 구조조정에 들어가기 전에 뼈를 깎는 각오로 자발적 사업 포트폴리오 조정을 선제적으로 해야 할 것이다.
작성일: 2010-05-17